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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서당(溪西堂)

창녕성씨 계서당(昌寧成氏 溪西堂)

37.0x61.4x5.3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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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계서당(溪西堂)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37.0x61.4x5.3
  • 건물명 계서당(溪西堂)
  • 공간명 창녕성씨 계서당(昌寧成氏 溪西堂)
  • 서예가
  • 위치정보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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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서당(溪西堂)

계서당(溪西堂)


계서당(溪西堂)은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있는 창녕성씨(昌寧成氏) 계서공파(溪西公派) 종가의 사랑채 당호이다. 계서의 ‘계(溪)’는 봉화를 가로질러 문경까지 흘러서 낙동강에 합류하는 내성천(乃城川)을 이르는 말로, 계서당이 내성천의 서(西)편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계서는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의 호이기도 하다. 그래서 종가 전체를 계서당이라고 통칭한다. 편액의 글씨는 작자 미상이다.

편액에 글씨가 가득하다. 좌우측 편액의 공간은 각박하다. 필획은 강하고 굳세고 구성은 단순하고 엄정하다. 남북조 시기 위용 있던 북조의 조상기나 석물의 새긴 글자 북비(北碑)의 글씨를 보는 듯하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창녕성씨 계서당(昌寧成氏 溪西堂) 소개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 1561~1629)는 경상남도 창녕에서 태어나 살았다. 1591년(선조 24) 문과에 급제하였지만,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해 화왕산성에서 곽재우(郭再祐)와 김륵(金玏)의 막하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부인 장수황씨(長水黃氏)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 상심하자 이를 지켜본 김륵이 자신의 종손녀인 선성김씨(宣城金氏)와 재혼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성안의 가족은 밀양에서 김륵의 향리이자 처가가 있던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에 임시로 피란하였고, 성안의는 다시 창녕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켰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내외직으로 분주하였던 성안의는 1613년(광해군 5)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로 이주하여 계서당을 짓고 정착하였다.

물야면은 봉화읍 북쪽에 위치하며, 가평은 너른 들을 갖추고 있는 지역이다. 이곳은 적어도 세 곳의 물길이 합류하는 지점이자 적어도 세 개의 큰 산들이 흘러내려 만나는 지점이다. 산록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은 가평 쪽으로 흘러 저수지에 모여 가평의 들을 적시며 결국 내성천으로 합류한다. 가평의 들은 만석산의 남쪽 산록과 응방산의 북동쪽 산록 사이에 펼쳐져 있고, 그 사이를 가평 두문 사이의 봉화군 1번 군도가 나누어 준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만석산 쪽으로는 계서당이 위치하고, 응방산 쪽으로는 구만서당이 위치한다.

성이성의 자는 여습(汝習), 호는 계서(溪西)이며 부친은 성안의, 모친은 선산김씨(善山金氏) 김계선(金繼先)의 딸이다. 그는 1595년(선조 28) 지금의 봉화군 동면 문단리에서 태어났으며, 13세 때 정경세(鄭經世)에게 보이자 크게 될 인물이라 하였다. 자라면서 학문에 더욱 정진하여 김굉필(金宏弼)과 이연경(李延慶)의 학통을 이은 강복성(康復誠)에게 수학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627년(인조 5) 문과에 급제하였다. 1637년(인조 15) 사간원헌납이 되어 윤방(尹昉), 김류(金瑬), 심기원(沈器遠), 김자점(金自點)의 오국불충(誤國不忠)의 죄를 논하기도 하였다. 사간을 역임하는 동안 직언으로 일관하여 주위의 시기를 받아 승진이 순조롭지 못하기도 하였다. 진주목사 시절 어사 민정중(閔鼎重)의 선치(善治) 보고로 표리(表裏 옷의 속감과 겉감)를 받았으며 강계부사 때는 삼세(蔘稅)를 모두 면제해 주어 백성들로부터 ‘관서활불(關西活佛)’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외직으로 담양, 진주, 강계, 창원 등 네 고을을 다스린 그는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네 곳 모두 선정비가 세워졌다. 1645년(인조 23) 청나라 사행길에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부인 봉화금씨(奉化琴氏) 금개(琴愷)의 딸 사이에 성갑하(成甲夏, 1621~1685), 성문하(成文夏, 1638~1726), 성대하(成大夏, 1647~1724) 세 아들을 두었다. 세상을 떠난 뒤 1786년(정조 10) 오천서원에 배향되었지만, 이 서원은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문집으로 2권 1책의 『계서선생일고溪西先生逸稿』가 있는데, 후손 성종진(成鍾震)이 1863년(고종 1)에 간행하였다.

1984년 국가민속문화재 제171호로 지정된 계서당종택은 사랑채인 계서당을 좌측면에 놓고 안채와 날개채를 붙인 ㅁ자 형태를 띠고 있다. 성안의가 처음 지을 때는 초가였으나, 성이성의 장남 성갑하가 충재(沖齋) 권벌(權橃)의 후손인 권석충(權碩忠)의 딸에게 장가들면서 처가의 도움을 받아 지금 모습의 종택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안채와 사랑채, 사당, 문간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안채는 정면 5칸으로 측면 3칸은 대청이며 좌우 2칸은 안방과 상방이 대칭으로 놓였다. 사랑채인 계서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으로 후대에 증축·개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면 3칸과 좌측면 2칸에 ㄴ자형 마루를 설치하였고 기둥 바깥으로 난간이 있는 좁은 마루를 두었다. 마루 뒤쪽에는 사랑방, 책방, 사랑윗방을 배치하였으며 마루 양쪽 측면은 널판으로 벽을 만들어 각 칸에 문을 달았다. 이 건물의 특이한 점은 사랑채의 툇마루 끝에 주인이 바깥에 나가지 않고 소변을 볼 수 있도록 판자로 3면을 막고 바닥을 뚫었는데, 지금 항아리는 보이지 않지만 예전에는 바닥 아래에 항아리를 놓아 간이화장실로 썼을 것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집으로 납도리 3량가 구조이며 내부에 운궁과 감실이 있다. 문간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으로 홑처마의 맞배지붕이며 납도리 3량가이다. 왼쪽부터 2칸은 우물마루를 깔고 고방, 부엌, 방, 대문간, 마구간, 화장실을 두었다.

설성경 교수는 『계서선생일고』와 성이성의 4대손 성섭(成涉, 1718∼1788)이 지은 『필원산어筆苑散語』의 내용을 기초로 다른 여러 자료를 검토하여 성이성이 판소리 춘향가의 인물인 이몽룡의 모델임을 밝혔다. 1607년 부친 성안의가 남원부사에 임명되어 5년 동안 남원을 다스렸는데, 이 시기에 성이성이 부친의 임기 내내 함께 남원에 있었으니 그의 나이 13세에서 18세라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를 토대로 현재 계서당은 이몽룡의 생가로 주목받고 있다.

참고문헌
  • 성이성, 『계서선생일고』.
  •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주)길건축사사무소, 『한국의 전통가옥 기록화 보고서』,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2014.
  • 설성경, 『민족고전 「춘향전」의 원류, 봉화 계서 성이성 종가』, 예문서원, 2017.
  •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역사관(http://www.ugyo.net)
  • 문화재청(http://www.cha.go.kr)